커다란 여객선이 별의 비호庇護를 받으며 검은 바다를 헤쳐나갔다. 쉬지 않고 세찬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던 배는 중간 경유지인 목포항에 다다라서야 겨우 멈췄다. 뱃사람들이 바쁘게 갑판 위를 뛰어다니며 닻을 내리고 항구에 정박할 준비를 했다. 사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죽은 듯이 누워있던 민현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새벽 세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가을의 천공天空은 눈부시게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정남향正南向에 태양이 높게 떠올랐다. 창문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본 민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차라리 비가 내렸다면 좋았을 텐데. 날이 밝아서는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는 속으로 하늘을 원망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의 옆에는 성우가 있었다. 성우가 불안해하거나, 걱정하거나, 마음...
철컹 철컹. 사람으로 가득한 노면전차가 종로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며 선로 위를 빠르게 달렸다. 자리에 앉은 성우 대신 민현이 가운데에 서서 전차의 진행방향을 예의주시했다. 그는 전차가 소공동 골목에 들어서기 무섭게 끈을 잡아당겨 하차 종을 울렸다. 땡땡,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전차는 소공동 거리 초입에 멈추었다. 두 사람이 내리고, 전차는 다시 바쁘게 달려나...
대기가 회색빛 구름으로 자욱했다. 비가 내리려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북촌의 골목을 지나자 차가운 물방울이 톡, 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종로로 향하는 성우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여느 해와 달리 차분한 숨소리로 그의 생일을 맞았다. 힘 없이 늘어진 어깨를 토닥여준 건 삼촌이었다. 삼촌은 사랑하는 조카가 그의 생일임에도 힘이 없는 이유는 졸업을 앞두고 ...
새로운 해로 거듭나며 일제는 많은 것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 첫 번째는 구정 설 제도의 폐지였다. 대신 그들은 양력 1월 1일을 설날로 지정하였고, 동시에 조선인들에게 차례상을 차리는 대신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신사참배란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 비롯된 기도 행위이다. 신도에서는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신을 비롯하여 자연 속의 ...
시간은 성큼성큼 흘렀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거세어졌다. 거칠 것 없는 찬바람이 평양에 불어닥쳤다. 어린 연인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추위와 맞섰다. 사랑채 문밖에선 연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났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발군의 추위였다. 흐르는 물조차 추위를 견뎌낼 순 없었다. 대동강이 꽁꽁 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를 역이용...
기말고사 기간이 되자 사랑채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경성고보를 다니면서 웬만큼 어려운 건 다 겪어 봤다고 자부했지만, 대학 시험은 아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민현은 책상 주변에 전공 책을 탑처럼 쌓아두고 그 안에 파묻혀 지내야 했다. 성우 또한 과목별로 책을 바꿔가며 밤새 공부에 매진했다.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민현은 최우수 성적을 받고 학기를 마...
흡사 급류에 휩쓸린 것 같았다. 열차가 멈추자마자 플랫폼에 있던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민현과 성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낑낑거리며 기차에서 내려야 했다. 역사驛舍로 들어가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평양은 경성과 부산에 준할 정도로 커다란 한반도의 중심도시였다. 역에는 조선 팔도는 물론이고, 멀리 만주국, 중화민국, 소련에서 온...
기온이 오르면서 작은 가지에 피웠던 꽃들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은 대지를 뜨겁게 달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에 맞춰 민현과 성우의 옷차림도 간편해졌다. 그리고 수은주의 빨간 줄이 눈금을 뛰어오를 때마다 본가에서 보낸 사람이 민현을 찾는 횟수도 늘어갔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서신을 전달하기만 하던 자가, 어느 순간부터 독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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